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탈리아 왕국 (문단 편집) === 팽창 정책과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 국민의 불만을 환기시키기 위한 팽창 정책으로서 [[스파치오 비탈레]]를 주장하고 [[로마 제국]] 부활이라는 명분 하에 [[에티오피아]]와 [[알바니아]]를 침공했다. 비록 알바니아는 3달도 채 버티지 못하고 강점되었지만, 에티오피아는 전면전으로 7달 동안 맞서 싸우다가[* 참고로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내에서도 군사강국이었다. 이미 이전에 이탈리아군을 괴멸시킨 사례도 있었다. 단, 아프리카 대부분은 주요 열강들의 식민지였으며 에티오피아와 [[라이베리아]]를 제외하면 제대로 된 독립국이 없었다.], 결국 이듬해 5월 수도 [[아디스아바바]]가 함락되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의 거점을 장악했다고 할지라도, 전역이 확보된 것은 아니었다. 강점 기간 내내 에티오피아 일부 고원은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를 받드는 [[왕당파|근왕세력]]의 통제 하에 남아있었다. 침공의 구체적 양상이 어떻든 간에 무솔리니 정권은 에티오피아 침공과 강점을 거부한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에티오피아 황제를 겸하게 된다. 1933년부터 무솔리니는 히틀러와 우호관계를 진전하기 시작했다. 에티오피아 및 알바니아 침공으로 미국·소련·프랑스·영국 등 다른 열강들과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이들 4개 국가가 침공을 노골적으로 방해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침공 결과를 인정하지도 않았다. 특히 미국과 소련은 이탈리아가 두 나라를 강점하고 있는 기간 내내 이들 나라에 대한 강점 자체를 승인하지 않았다. 프랑스와 영국도 이탈리아 왕의 에티오피아ㅈ 황제위와 알바니아 왕위를 승인하지 않고 강점 자체만 38년 인정했다가 제2차 세계대전에 이탈리아가 참전하면서 이 승인마저도 취소한다. 연합국 진영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신생 이탈리아 정부와 체결한 '평화협정(Treaty of Peace)'에서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알바니아 강점의 합법성을 부인함을 분명히 했고 이탈리아 정부가 에티오피아 정부에 배상금을 지불하도록 했다.], [[파시즘]]과 [[나치즘]]의 사이가 빠르게 가까워진다. [[스페인 내전]]에는 함께 [[프란시스코 프랑코]] 진영에 자금·군장비·의용군을 파견하기도 했다. 비록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 두 나라 간 긴장이 급속도로 높아졌지만 곧 진정되었고 이탈리아는 [[쥐트티롤]] 영유권 인정을 대가로 독일의 [[안슐루스|오스트리아 합병]]을 승인했다. 결국 1940년 6월 프랑스가 독일에 의해 궁지에 몰리자 이탈리아는 독일 편에 서서 프랑스에 선전포고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에 추축국으로 참전하게 된다. 하지만 이탈리아 군대는 독일에게 털린 프랑스 남동부 지역을 침공하는 데도 고전을 면치 못했고 다른 지역에서도 연패하여 참전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독일군의 지원을 받았음에도 [[에티오피아]]와 [[리비아]] 전역이 [[연합군]]에게 털려버리고 그 후 [[1943년]] [[추축국]] 중에서는 거의 [[이라크 왕국]] 다음으로 항복해 버렸다. 이후 이탈리아 왕국은 존속하지만, 이탈리아에 [[연합군 점령하 이탈리아|연합군의 군정부]]가 들어서게 되었다. 무솔리니를 비롯한 파시스트 잔당들은 나치가 북이탈리아에 [[살로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을 만들고 거기서 연명하다가 결국 [[베를린 전투]]와 비슷한 시기에 멸망하면서 살로 공화국 지역은 자연스레 이탈리아 왕국 땅으로 돌아왔다. 나치 독일 초기에는 독일과 껄끄러운 관계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오스트리아 병합|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였을 때]]는 '''전쟁'''까지도 고려하였고[*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병합되면 이탈리아 북동부가 나치 독일과 국경을 접하게 된다. 거기다 이탈리아에도 독일계 다수 지역인 [[쥐트티롤]]이 존재했으니 히틀러의 행보를 보아할 때 [[주데텐란트 요구]] 같은 일이 일어날 걱정해야만 했다.] 강철 조약 이후에도 당시 국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전통적인 우방 프랑스를 버리고 독일을 택한 데에 대한 우려를 표방했다. 특히 인종관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큰 차이를 보였는데 히틀러는 광적으로 인종적 순혈주의에 집착했는 데 반해 무솔리니가 추구한 제국주의와 급진적 민족주의는 '''생물학적 인종주의'''를 배격하며, 히틀러의 인종정책에 비판을 가했다. 이 시기 이탈리아는 옛 [[베네치아 공화국]]의 [[슬라브]], [[그리스]]계 영토들도 많이 흡수했고, 이탈리아는 원래 독일보다 인종적, 문화적인 면에서 다양성이 깊었기 때문에[* 로마제국 수백년간 지중해의 수도로써 수많은 인종이 유입되어 이탈리아 반도는 유전적 다양성이 매우 높은 지역이 되었다. 서로마가 멸망한 후로는 상대적으로 고립되긴 했지만 중세~근대에도 여전히 지중해 한 가운데에 툭 튀어나온 교통의 요지로써 많은 인종 유입과 혼합을 겪었다.] 나치의 우생학적 인종 순혈주의에 대한 집착은 결코 대중화되기 힘든 토양이었다. 그러나 파시스트 이탈리아라고 해서 인종-민족주의적 차별과 박해를 가하지 않은 건 아니다. 나치식 순혈주의로 사람 급을 나누는걸 거북하게 여긴다는건 자국민 내부에서의 이야기일뿐, "통일 이탈리아인"으로서의 민족 정체성 자체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거부하는 피지배 인종-민족들과는 갈등을 빚고 폭력을 행사했다. 베네치아와의 역사적 접점을 통해 주로 현지 [[크로아티아]] [[우스타샤|남슬라브계 민족주의자들]]과 소유권을 두고 경쟁했던 달마티아 해안 지방에서는 학살과 인종청소를 저지르며, [[류블랴나]] 일대에서만 현지 인구의 7~10% 정도의 사람들을 직영 혹은 동맹 나치스의 수용소로 보냈다. 그리스에서도 도메니콘 학살을 비롯한 반빨치산 '평정' 을 명분으로 대량 학살을 종종 저질렀으며, 아예 유색인종이었던 식민지 [[리비아]]와 침공 이후 연합군이 해방하기 전까지 점령했던 에티오피아에서는 훨씬 더 많은 수의 학살과 인종 청소를 저질렀다. 동맹국 독일과 연줄이 있는 [[쥐트티롤]] 지방에서도 반파시스트 숙청과 문화, 언어적 탄압을 저지르며 강제적인 이탈리아 동화 정책을 폈다.[*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병합]]을 이탈리아가 인정하는 조건으로 쥐트티롤 지방에 대한 탄압을 묵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